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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약산 김원봉 업적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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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은 영화"암살"과"밀정"에서 일제 강점기 무장 독립운동단체,항일비밀결사 조직(의혈단)을

이끈 인물로 조명된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가 또 다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약산 김원봉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김원봉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고,군인,정치인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그는 일제강덤기에는 의열단장을 

하였고,민족혁명당 총서기,조선의용대장,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으로 호라동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별였습니다.김원봉은 22세의 나이에 만주에 건나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 및 폭탄제조법 등을

수료 하였습니다.김원봉은 학교를 자퇴 후 새로운 개념의 부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였고,의혈단을 조직

하게 됩니다.


1920년부터 김원봉은 의열단의 단장이 됩니다.김원봉은 의열단을 지휘하며 조선총독부,부산경찰서,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했습니다.그이후에도 단원들을 시켜 일본군 대장을 저격하도록 하였고,1923년 의열단원

김지섭은 동경으로가서 일본왕궁 정문 앞에 있는 이중교 다리에 폭탄을 던져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궁으로 들어가 일본의 일왕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이중교에 폭탄을 던진 후 곧 붙잡혔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935년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민족 혁명당의 총서기가 되었습니다.그리고 김원봉은

1938년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이 되었습니다.일본군에 맞서 무한 방위전에 참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곳을 옮겨다니며 항일 전투를 하였습니다.

1945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충칭에서 9차 전당대회를 거행하고,국내외 각 민주당파와 민주영수를 단합하여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을 위해 투쟁한 강인한 인물 이었습니다.1923년 중국 북경에서 

의혈단 활동을 했던 김성숙은 김원봉을 이렇게 회상 했습니다."김원봉은 광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끗이 이뤘지요.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지요.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 었습니다."

김원붕은 해방이 된 이후 남한정권에서 친일파의 신분세탁 도구로 악용되어 어쩔수 없이 북한으로 갈 수

밖에없는 상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이때부터 김원봉은 6.25전쟁 이전에 북한으로 월북하였고,북한의 서열3위

라고 불릴정도로 남한에서는 꼭 사살시켜야할 인물이었습니다.해방이후 친일파의 세탁도구로 이용되어

월북한 안타까운 인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김일성에거 잠시

필요했던 존재로 상용되고 숙청되어진 안타까운 인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이 것은 통일 되야만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 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독립운동가 집안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평가를 못받앗고 그자손들은 대체로 못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그에반해 친일파의 자손들은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덩떵거리고 잘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아직도 서훈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우리나리는 너무나 뼈아픈

근현대사를 경험했고 그런 과정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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