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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이완용 을사오적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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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친일 행각으로 조선이 입은 피해는 이루 헤아릴수 없지만,가장 큰 것들만 나열해 보겠습니다.

-을사오적이 되어 을사 늑약을 강제 체결하는데 앞장 섭니다.이일로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겼습니다.

-조선에서의 일본의 부당한 행위를 알리고자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일이 알려지자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하여 황제위에서 내려오게 하고,순종을 강제로 즉위 시킵니다.

-한일신 협약이 성사되도록 주도하여 인사,행정,입법권을 일본에게 넘겨 줍니다.

-1907년 기유각서를 이완용 단독으로 처리하며 사법권마저 일본에게 넘겨 주게 됩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게 빼았기고,일본은 그동안 이완용의 공을 인정하여 백작으로 임명합니다.

-1920년에는 3.1운동을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싣고 일본으로 부터 후작에 임명되고,아들 또한 남작이 되었습니다.




이완용의 출생과 배경

1858년6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서 축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 이씨입니다.부친은 이호석 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1867년 10세때 친척이자 예방승지로 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려졌습니다.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애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어었습니다.

이호준은 청혐한 관릴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완용은 양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1870년 13세때

양주조씨와 혼인하였습니다.1882년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1886년 규장각대교에 입명되었습니다.

이후 검교,홍문관 수찬,동학교수,해방영군사마를 역임 하였습니다.

친일파로 전향과 을사늑약의 주역으로 활역하는 이완용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

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습니다.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리-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 하였습니다.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같은해11월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의 한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습니다.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되었으며 그래12월에 의정대신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하게 됩니다.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매국노 이완용의 최후

1909년 10월 이재명 의사와 동지들은 함께 일제에 영합해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이완용 처단을 책임진 이재명 의사는 기회를 엿보던중 1909년12월22일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고 거사를 계획했씁니다.이재명 의사는 성당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일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때 비수로 이완용을 찔렀습니다.

이재명 의사가 휘두른 세번의 칼끝은 이완용에게 치명상을 입혔습니다.특히 왼쪽 어깨로 들어간 첫번째 칼은

이완용의 폐를 관통했습니다.숨으 쉴때마다 공기가 새어나와 폐기종을 일으킬 징우까지 보였습니다.출혈이

심하고 맥박까지 불규칙해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히완용은 일본의 보호 아래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았습니다.이완용이 받은 수술은

한국의 흉부외고 수술 1호이기도 했습니다.이완용은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죽는 날까지 폐렴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이날 입은 상처는 이로부터 17년 뒤인 1926년 이완용의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매국노 이완용이 소유했던 부동산이 여의도의7.7배 크기의 토지였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지금도 부유하게 잘살고 있다고 합니다.이런 부분은 빨리 바로 잡아햐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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