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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대조영 발해건국 발해멸망 까지 한번에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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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당나라는 고구려 땅을 직접 다스리고자 하였습니다.그러나

고구려 땅 곳곳에는 유민들이 당에 계속 저항 하였습니다.고구려를 점령한 당은 고구려가 다시 나라를 일으킬까

두려워 20만 명이 넘는 고구려 주민을 당으로 끌고 갑니다.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의 황무지 땅에서 고달프고

처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조영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로 끌려가게 됩니다.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대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이로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걸걸중상과

말갈의 족장인 걸사비우는 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했고,측천무후의 회유책에도 불고하고 동쪽으로 이동,당의

장수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전투가 바로 발해 건국의 전초전이 된 천문령전투 입니다.이때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고 대조영은 남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게 됩니다.대조영은 698년에 천문령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를

하고 동모산에서 진국을 건국하게 됩니다.당의 북진 청책을 위협하던 돌권과 동맹을 맺고 대당 견제세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대조영은 705년에 당과 화친을 하고 713년 당나라는 고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 합니다.

719년 고왕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개국군주로 남고 붕어한뒤 그의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물려 받았습니다


발해멸망
926년 부국강성을 누리던 발해는 어느날 갑자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당시 국세를 떨치던 발해가
왜 한순간에 무너져야 했는지 아직 우리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당시 약 100만 여명에 달했던
발해인들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당시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 1.5배 넓고 통일신라의
영토보다 3배 이상의 크기였다고 합니다.발해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그중 가장 유명한
2가지는 내부분열설과 화산폭발설을 들수가 있습니다.화산폭발 설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926년 에 백두산에서
대폭발이 일어나서 그 화산재가 발해의 도읍 상경까지 퍼져 나갔습니다.상경을 비롯한 백두산 주변의 여러
곳은 크게 화산재가 떨어져 심한 가뭄이 들고,그 반경은 거의 초토화 되었으며 이때 거란이 침칩하여 멸망
하였다는 설입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발해멸명은 926년 정월,발해의 대궐 상경성을 거란 군사들이 포위하였습니다.왕은 소복을
입고 양을 끌고 대소 신료와 함께 거란의 주군에 항복하기 위해 도성을 나왔습니다.유목집단인 거란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훗날 요나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야율아보기 때부터 였습니다.야율아보기에게 항복한 발해
마지막 왕은 시호마저 기록에 나와있지 않습니다.발해가 멸망하는 10세기에 들어 발해를 통치한 왕은 15대
대인선 입니다.발해의 멸망은 그가 재위에 오른지 20여년 뒤의 일입니다.


발해인들의 고려 망명

거란은 발해 유민을 대거 요하 유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이때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이 수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 했습니다.많은 발해인들이 거란의 지배를 거부하고 고려로 넘어왔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널리 이들은 환대하며 포용하는 정책을 펼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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