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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홍범도 장군 업적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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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 한자루를 들고 일본군에 맞선 청년,항일무장투쟁운동의 시발점이자

대한독립군 역사상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첫승리를 안긴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인물,이전투를 발판삼아 

청산리대첩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했습니다.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감삽으로 이사한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그러던중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일본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빼앗으려 하자 이에 저항해 의병부대를 결성 합니다.이에 삼수,갑산

지방의 포스들이 총포를 회수하러온 일본군과 싸워 북청,휴치령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여 크게 격파 하였습니다.

이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9시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전멸 시켯으며 이후 갑살을 완전히 장학 합니다.


봉오동 전투

1920년 홍범도,최진동,안무 등 대한 북로독군부 한국 독립군 엽합부대는 중국 지린성 허룽현 펑우동에서

일본군 월강 추격대대와 전투를 지칭합니다.이것이 바로 봉오동전투 입니다.봉오동은 분지의 형태 였습니다.

대구와 흡사한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 정도 형성이 되어있었고 골짜기 안에는 마을이 3개가

있었고 홍범도 장군은 지형을 고려하여 4개 중대로 포위하는 형태로 나누어 배치를 하게 됩니다.

신식 총기로 무장을 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진 일본군에 비해 그화력이 미약했으나.일본군은 독립군의

화승총 정도 가지고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무시하다가 크게 당하게 됩니다.

특히나 매복작전에 대한 자신이 있었던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 내내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려 전투에

임했습니다.조선인 민간인들은 계속 사실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가고 일본군은 계속해서 봉오동으로

진격을 하게 되는데 일본군이 매복한 지점으로 도착하자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히 사격했고

일본군은 힘한번 못쓰고 퇴각하게 됩니다.일본군 부대는 봉오동에서 철수하게 되고 홍범도 부대는 일제

추격대를 격퇴하게 됩니다.


청산리 전투

대한민국의 독립투사들은 한반도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중국과 러시아 쪽의 만주,연해주로 이주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됩니다.이에 만주 지방의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토벌 작전을 계획합니다.혼춘사전을 조작함으로써 출병의 구실을 만들고 대규모의 일본군을 간도에 투입

했습니다.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고 백두산 부근 화룡현 일대의 밀림

지대로 집결 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연대장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침입한 일본군을 백운평계곡

에서 섬멸하였고,홍범도의 대한독립군,국민군 엽합이 완루고,고하동,봉밀구,천수평의 밀림지대에서 10여차례

전투를 벌인것들을 총칭해서"청산리전투"라고 말합니다.그중 가장큰 규모르 장시간동안 펼쳐졌던 혈전이 바로

어랑촌 전투 입니다.여기서 일본군은 천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습니다.독립군 최대의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이때의 일본군들은 독립군의 2배 이상의 병력과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독립군의 굳건한 항전의지와 현지 한인주민들의 헌신적인 지원,자발적인 정보활동

으로 독립군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국독립전사상 최대의 대첩을 만들어 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에서 큰 승리로 꼽히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그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었습니다.홍범도

장군은 무장 독립 투쟁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며 일제에 나라를

빼았긴 한은들의 아픔을 품에 안았습니다.하지만 평생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홍범도 장군은 머나먼 타지에서

광복의 기쁨도 맛보지 못한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독립을 염원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전장에 자신을

던졌던 홍범도 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모두가 기억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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